영화평론 〈그래비티〉 이해와 감상 - 하편

2019. 6. 16. 21:54

 

고도를 잃고 대기권으로 추락하는 티엔궁(중국우주정거장)에 무사히 도착했다. 탈출선 선저우에 탑승 후 교신이 끊어진 휴스턴과의 대화를 계속 시도한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에도 공간을 진동하는 목소리는 삶에 대한 간절함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내가 보기에 결과는 둘 중 하나다. 멋진 여행을 다녀왔다고 자랑하든지 아니면 10분 안에 불타 죽든지. 어찌됐건… 어찌돼든, 밑져야 본전이니까! 왜냐면 어느 쪽이든 엄청난 여행이 될테니까.”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이어져있다는 인식의 확장으로 나아간다. 사람들을 만나 자랑하거나 만약 죽으면 그리운 딸을 볼 수 있다는, 어느 쪽으로든 멋진 여행이 될거라고 둘을 잇는다. 태어나자마자 사망선고를 받은 인간은 평생 죽음을 산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삶과 죽음은 닿아있고 죽음은 또다른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철학적 차원에 도달한 인간의 깨달음은 수많은 관객의 마음을 동시에 뒤흔든다. 돌아가서 멋진 모험담을 자랑한다는 것은 귀환 자체가 상대방과의 대화와 소통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지구와 사람이 싫어서 떠났지만 가혹한 우주를 경험하고 그 모든 관계의 소중함을 알게됐다. 한 인간의 내적 성장담을 영화는 깊이있는 화법으로 담담하게 그려낸다.

 

티엔궁에서 분리된 선저우(탈출선)는 맹렬한 속도로 지구 대기권을 향해 날아간다. 불타 죽을 것인가 삶을 이어나갈 것인가, 라이언의 운명은 그 짧은 몇 분 동안에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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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박이 내릴 때 크기와 무게에 상관없이 같은 속도로 땅에 떨어지듯이 대기권으로 진입하는 우주 파편들도 같은 중력가속도의 힘을 받아 속도는 일정하다. 이 장면에서는 크기와 모양이 각기 다른 잔해들이 속도가 서로 달라서 이리저리 부딪히고 선저우에 타격을 입히는데 이것은 극적 장면 연출을 위한 영화적 허용으로 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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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은 어느 호수에 무사히 착륙하여 물에 가라앉은 탈출선을 빠져나와 세상으로 나온다. 이것은 자궁 속의 아기가 양수를 뚫고 탄생하는 것과 사실상 같은 의미이며 호숫가에 이르러 네 발로 기어가다 두 발로 딛고 일어서서 걸어가는 모습은 인간의 성장과정과 궤를 같이한다. 다르게 생각하면 탁한 물에서 탄생한 생명이 양서류(개구리)의 진화를 거쳐 뭍으로 나오는 생명의 진화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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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했던 우주와 달리 지구는 벌레소리 새소리 물결치는 생명의 소리로 가득하다. 라이언은 땅에 이르러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고 물과 흙과 공기와 함께 주어진 또다른 삶에 감사한다. 중력을 이겨내고 일어서려는 순간 쓰러지고 마는데 다시 일어서서 한걸음씩 성큼성큼 나아가는 엔딩 장면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터 중력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중력은 저마다 지고있는 삶의 무게와 같다. 그 짐이 힘겨워 때론 넘어질 지라도 살아가고자 한다면 버티고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를 상징적인 연출로 보여준다. 마지막 엔딩 시퀀스의 미학적 성취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탁월하다. 화려한 우주액션을 기대했던 분들께는 실망스러운 작품이었을 지도 모르겠으나 영화가 담고있는 철학적 깊이를 음미할 수 있었던 관객들한테는 전율과 감동을 느낄 수 있었던 명작으로 기억될 것이다.

 

Thank You, Ryan ! Let’s go !

 

평 론

 

〈그래비티〉는 2014년 제8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SF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감독상, 촬영상 등 7관왕을 달성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오랜 친구인 엠마누엘 루베츠키 촬영감독과 환상적인 호흡을 선보이며 예술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영화사(映畵史)의 기념비적 수작을 만들어냈다. 특히 오프닝 시퀀스에서 펼쳐지는 12분간의 환상적인 롱테이크 카메라 워크는 우주를 체험하는 영화의 진수를 보여줬다. 〈그래비티〉는 전반적으로 사실감과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이런 촬영방식을 자주 활용한다. 영화 속 인물이 경험하는 시간과 관객이 영화를 관람하는 시간의 격차를 좁혀 체험하는 영화를 구현하기 위한 목표를 높은 수준의 완성도로 달성해냈다.

 

〈그래비티〉는 공간(사회,세계)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다룬다. 라이언은 딸의 죽음 이후 복잡하고 시끄러운 지구를 떠나 우주로 나왔다. 고요하고 광활한 우주가 탁 트인 해방감을 주기도 하지만 그곳은 삶을 영위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공간이다. 공기가 없어 소통도 불가능하고 기압도 산소도 없다. 우주에서의 삶은 불가능하다. 라이언은 지구와 동료들과의 관계가 모두 끊어져 홀로 고립된 무중력의 공간에서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재난인지 깨닫는다. 삶을 향한 의지를 불태우며 그 모든 관계 회복과 소통의 의미를 담아 지구로 귀환하는 이야기는 서사적으로도 매우 잘 짜여져 있다. 자연재난 처럼 묘사되는 우주사고를 겪은 후 내적 아픔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영화적으로 멋지고 아름답게 그려냈다.

 

〈그래비티〉는 삶과 죽음의 문제도 철학적으로 깊게 고찰하고 있다. 누군가의 죽음은 다른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지고 삶과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닿아있다는 통찰은 인간으로 하여금 숙연한 정서를 불러 일으킨다. 감독 자신이 밝힌 것처럼 영화에는 생명과 관련된 과학적 상징과 비유가 풍부하게 들어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런 상징들은 삶과 죽음의 관계와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래비티〉는 인간들이 사는 세상과 ‘나’의 관계를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게다가 생명의 역사를 압축하여 영화적으로 아름답게 녹여낸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러가지 면에서 이 영화는 SF장르를 넘어 영화사(映畵史)에서 다시 보기 힘든 탁월한 작품임에 틀림 없다.

 

지인 작가, 평론가

destiny2135@gmail.com

어린지인 영화 평론

영화평론 〈그래비티〉 이해와 감상 - 중편

2019. 6. 16. 21:46

 

어둡고 광활한 우주에 홀로 내 던져진 인간은 공포를 경험한다. “누구든, 아무라도 듣고있나요? 제발 들어줘요.” 맷과의 통신마저 끊어지고 먼저 교신을 시도하는 이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사람들과 소통이 싫어서 지구를 떠난 라이언이 죽음에 직면한 순간 생존을 위해 다른이를 찾는다는 설정은 굉장히 역설적이다. 삶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든 관계를 맺고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익스플로러호 내부를 수색해 동료들의 시신을 목도한 두 사람은 그들이 유일한 생존자임을 확인하게 된다. 삶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끊어진 휴스턴과의 교신을 계속 시도한다. 소유즈를 타고 지구로 귀환하기 위해 국제우주정거장(ISS)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두 사람은 한 몸처럼 연결되어 있지만 언제 끊어질 지 모르는 위태함이 상존한다. 우주를 유영하며 아름다운 일출을 감상하고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눈다. 

 

라이언한테는 4살 된 딸 '새라'가 있었다. 딸은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다가 넘어서져 머리를 부딪혔고 그렇게 허망하게 사랑스러운 딸을 잃었다. 그 이후로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무의미한 쳇바퀴같은 인생을 살아왔다. 딸의 죽음 이후 라이언 주위는 이런저런 소문들로 매우 시끄러웠다. 대단한 일도 아닌, 아이들이 놀면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죽었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말들이 많았다. 위로의 말조차 듣기 싫었다. 견디기 힘든 시간이 이어졌다. 말소리가 싫어서 라디오를 들을 때도 조용한 것들로만 골라 들었다. 사람과 인간세상이 싫어서 우주로 나왔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지구를 떠나 고요한 우주가 차라리 좋았다.

 

그녀는 매우 외로운 사람이다. 이혼했는지 사별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남편도 없고 딸도 없다. 지구의 그 어느 누구도 위를 올려다보며 그녀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없다. 스스로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혼자 살아가리라 마음먹었지만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 다른이의 도움(관계)은 절실해진다.

 

두 사람을 연결해주는 줄은 ISS에 접근하는 속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어딘가에 걸려 끊어져버렸다. 소유즈는 외관손상을 입어 낙하산이 펼쳐져 있고 지구 재진입용으로 사용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다. 서로를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라이언은 느슨한 낙하산 줄에 의지해 자칫하면 두 사람 다 죽을 운명에 처한다. 라이언이 맷을 잡아당기는 순간 반작용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에 줄이 끊어질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맷은 라이언의 목숨이라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줄을 놓는 선택을 한다. “자넨 할 수 있어 라이언”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남기고 그는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지구와의 교신도 끊어지고 유일하게 의지했던 동료마저 떠나 보내고 그녀는 그렇게 홀로 덩그러니 남겨졌다. 모든 관계가 끊어지고 적막한 우주공간에 홀로 고립된 인간은 공포를 경험한다.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광활한 우주에서 이제 오직 삶을 향한 의지만이 그녀를 채찍질 할 것이다.

 

맷은 통신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그녀를 독려하며 정거장 안으로 인도했다. 갠지스 강 위에 걸린 해가 놀랍도록 아름답다는 말을 남기고 그는 어두운 우주공간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산소가 없어 호흡이 곤란해진 상황에서도 그의 격려에 힘입어 내부 진입에 성공한 라이언은 잠시 기진맥진하여 쓰러진다.

 

삶과 죽음은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와 같다. 누군가의 죽음과 희생은 다른 생명의 재탄생으로 이어진다. 태아가 엄마의 자궁 속에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상징적 연출은 인간으로 하여금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정신을 차리고 맷과 교신을 시도해봤지만 그는 응답이 없다. 시끄러워서 듣기 싫었던 그의 수다가 그리워지는 아이러니가 안타까움과 슬픔을 배가시킨다. 그녀는 동료를 모두 잃고 외롭게 홀로 우주에 남겨졌다. 휴스턴과의 연결이 끊어진 상황에서도 역동하는 지구를 내려다 보며 자신이 유일한 생존자임을 보고한다.

 

 ISS와 분리된 소유즈가 낙하산 줄에 걸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우주 파편의 습격도 잘 견뎌냈건만 결정적인 순간 연료 분사 버튼이 작동하지 않았다. 저 멀리 삶의 유일한 희망인 선저우가 보이는데 이대로 포기해야 되는 것인가. 삶의 끈을 놓지 않은 필사의 노력이 절망으로 다가오자 몸부림 치며 격정적 외침을 토해낸다. 기도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본의 아닌 상황을 바꾸는 것은 삶을 향한 강한 의지와 행동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어떻게든 해결책을 모색해서 삶으로 나아가거나 선택은 두 가지 뿐이다.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계속 지구와 교신을 시도하는 것은 그녀가 순간 삶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여도 아직 여전히 삶의 희망을 놓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나중에 꿈에서 맷을 만나는 장면으로 구체화된다. 교신은 성공했지만 라디오 너머의 그 누군가와는 언어가 달라서 소통하지 못한다. 멀리서 들리는개짖는 소리를 흉내내는 그녀의 목소리는 죽음을 앞둔 인간의 울부짖음처럼 느껴져 너무 슬프게 다가온다. “날 위해 슬퍼해 줄래요? 절 위해 기도해주실래요? 너무 늦었나요?” 죽음의 공포에 직면하여 인간이 관계의 소중함을 비로소 깨닫는 순간은 매우 역설적이다. 곧 죽은 딸을 볼 수 있다는 체념은 이대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더해 준다.

 

죽은 줄 알았던 맷이 돌아와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여는 순간 내부 공기가 모두 빠져나가며 이어지는 38초 간의 정적은 영화적 연출의 마법같은 장면이다. 실제로는 문을 여는 순간 죽고 말지만 꿈이라는 장치를 활용하여 논리를 파괴하고 허점을 매끈하게 피해간다. 〈그래비티〉가 굉장히 시(詩)적인 이유는 시처럼 형식과 논리와 언어의 파괴를 통해 장르적 관습 탈피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기존 SF영화의 화려한 액션활극과는 결이 다를 뿐만아니라 이처럼 소리가 사라지는 마법같은 연출은 〈그래비티〉의 영화적 가치가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마치 영화의 문법을 파괴하는 듯한 이렇게 강렬하고 인상적인 정적은 처음 봤다. 상영 사고가 벌어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사실은 치밀하게 의도된 영화적 화법이다. 'Life in space is impossible' 우주에서의 삶(생존)은 불가능하다.

 

또한 〈그래비티〉는 과학적 상징과 비유를 풍부하게 담고있고 이야기의 빈공간이 많아 관객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시적이다. 라이언이 왜 우주에 왔고 딸의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우주에서의 깨달음과 지구로의 귀환이 함의하는 바는 무엇인지 관객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라이언이 삶을 포기하려고 하는 순간 공기는 모두 빠져나가 버린다. 공기가 없으면 숨을 쉴 수도 사람과 소통할 수도 없다. 비록 꿈의 환상이지만 그가 공기를 채워줌으로써 두 사람은 다시 연결되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준다. 그는 연착륙 제트엔진 사용을 일러두고 삶의 용기를 북돋워 줬다. “지구로 돌아갈거야 아님 여기서 계속 살거야? 자식을 먼저 잃은 것보다 큰 슬픔은 없어. 가기로 결정했으면 계속 가야해. 땅에 두 발로 딱 버티고 서서 살아가는거야.” 삶이 불가능한 세계를 벗어나 지구로 돌아가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슬픔을 극복하며 살아가야 한다.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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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지인 영화 평론

영화평론 〈그래비티〉 이해와 감상 - 상편

2019. 6. 16. 21:38

 

장면에 대한 언급 없이 영화의 이해와 감상을 논하는 것은 허구라고 생각합니다.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지구로부터 600KM 떨어진 곳의 온도는 화씨 -258도와 -148도 사이에서 변동을 거듭한다.

소리를 전달하는 매질(공기)도 없고 기압도 산소도 없다. 

우주에서의 삶은 불가능하다.

 

〈그래비티〉 오프닝은 21세기 영화사(映畵史)에 기록될 만큼 탁월하다. 이 영화가 구현하는 미학적, 기술적 목표가 철저하게 영화의 핵심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시작하자마자 12분 동안 편집없이 이어지는 롱테이크 장면은 관객들로 하여금 마치 우주를 직접 유영하는 듯한 체험을 선물한다. 영화 속 극중 인물이 경험하는 시간을 온전히 구현해낸 이런 촬영방식은 사실감과 몰입도를 배가시킨다. 그러면서 사실은 공간(세계)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그려내고 있다. 롱테이크라는 기술적 방식이 어렵다거나 현란해서라기 보다는 주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위대하다.

 

의공학자인 라이언 스톤 박사(이하 라이언)는 허블 우주망원경 수리 임무를 맡아 처음 우주에 왔다. 그런데 베테랑 우주인 맷 코왈스키(이하 맷)는 라이언 주위를 맴돌며 별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떠들어댄다. 계속되는 맷의 수다를 라이언은 심드렁하게 듣게 되는데 그게 관객의 입장과 똑같다. 그녀는 주위에서 누가 말을 걸거나 시끄럽게 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지구를 떠나 우주로 나온 개인사는 영화에서 부분적으로 중요하게 언급된다.

 

“여기 있어서 제일 좋은게 뭐야?” “고요한거요. 익숙해지겠지만요.”

 

우주정거장으로 긴급대피 착수 명령이 떨어졌다. 러시아 위성이 미사일 공격을 받아 생긴 파편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다른 위성과 충돌했고 그 파편들이 맹렬한 속도로 허블망원경 궤도에 쏟아졌다. 이 사고로 통신위성이 피해를 입어 휴스턴과의 통신도 끊어진다. 지구와의 관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이제 생존을 위해서는 남겨진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해진다.

어린지인 영화 평론

영화평론 〈곡성〉 이해와 감상 - 하편

2019. 3. 12. 17:25


효진이네 집 앞에서 한바탕 굿 판이 벌어지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은 마치 카메라 필터 효과같은 느낌으로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징, 꽹과리, 북, 피리 소리가 비명소리와 함께 어지럽게 뒤섞이며 효진이는 이내 쓰러지고 만다. 이 장면에서 황정민과 김환희양이 보여주는 연기는 '신 들렸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마치 악령이 든 아이와 무당에 각각 빙의된 듯 어우러지는 연기 앙상블은 관객을 그대로 빨아들인다. 나는 강력한 사운드와 이미지가 주는 충격 때문에 잠시 정신이 아찔해지고 숨이 막히는 듯 했다. 시골 사람들한테는 무속적 세계관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곡성(哭聲)’을 배경으로 무속을 가져와서 낯설지도 모르는 관객들에게 거부감 없이 다가가게끔 만들었다.


일광은 효진을 만져보더니 자신이 지금까지 본 악질 중에 갑 중에 갑이라면서 누굴 만난 적 있냐고 종구에게 물었다. 종구가 일본사람을 만났다고 실토하자 일광은 말했다. “그 양반 사람 아니여. 그 양반 귀신이여.” 영화를 처음 볼 때 제대로 낚였던 장면이다. 마을의 이 모든 원흉이 일본인 때문이니까 무당이 당연히 그놈을 퇴치하러 왔겠지 싶었다. 일본인의 정체와 둘 사이의 관계를 정확하게 모르는 상황에서 관객은 속을 수밖에 없다.


종구는 일광(日光)과 함께 그의 집에 찾아가서 굿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대화가 끝나고 종구가 일본놈에 대해 질문하는 그 순간 일광은 훈도시를(일본 성인 남성이 입는 전통 속옷) 입고 있다. 이 장면은 명백히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눈치 빠른 사람은 이 인물이 일본놈과 어떻게든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즉 이 모든 것들이 큰 그림을 위한 낚시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생긴다.


일본놈이 귀신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산 사람이 귀신이라는 건지 이해가 잘 안된다고 종구가 묻자 일광은 알 수 없는 대답들만 쭉 늘어놓는다. 귀신이 들린 거라면 왜 하필 우리 딸이냐고 묻자 일광의 대답이 걸작이다. “고놈은 낚시를 하는 거여. 뭐가 딸려 나올지는 몰랐겄재 지도. 고놈은 그냥 미끼를 던져분 것이고 자네 딸내미는 고것을 확 물어분 것이고. 고것이 다여.” 즉, 너의 불행은 다 우연일 뿐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카오스는(무질서) 답을 하는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설명을 들었지만 종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딸이 죽을 지도 모르는데 이유가 없다니 이게 말인가 막걸리인가. 불행과 고통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유를 묻게 만든다. 인간은 필사적으로 해답을 갈구하지만 돌아오는 건 공허한 메아리 뿐이다. 일광은 종구를 낚고 또 관객들을 열심히 낚고 있다.


일본인은 폭포수를 맞으며 기를 한껏 모으고 있다. 어떤 의식을 거행하기 전에 몸을 정갈하게 하고 정신을 가다듬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것을 멀리서 빼꼼히 쳐다보는 무명. 그녀는 이미 이 때 일본인이 사는 곳 근처에 와 있다. 앞으로 이어지는 장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명이 어디에 있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왜놈은 죽은 사람을 소생시키는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나중에 이 사람은 악귀같은 괴물의 형상으로 종구 일행을 습격한다. 살아나기는 했지만 좀비처럼 끔찍한 모습으로 시각적 충격을 준다. 예수가 죽은 자를 살린 기적을 영화 속에서 이런 식으로 전복시키기 때문에 반기독교적 정서가 도저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인 캐릭터는 무속적 세계 속에 기독교적 세계관을 집어 넣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어색한 듯 보이지만 의외로 두 세계는 쉽게 잘 붙는다. 왜냐하면 무속의 토양 자체가 흡수력이 높고 단일한 하나의 믿음 체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당 중에는 관우, 무열왕, 맥아더 장군 심지어 예수까지 모시는 분들이 있다. 무속은 이렇게 여러가지를 끊임없이 먹어치우며 발달한 일종의 종교다. 그래서 내부의 질서가 없는 ‘카오스’로 해석하는 것도 크게 무리가 없다. 


같은 시각, 효진이네 마당에서는 살을 날리는 위험한 굿 판이 열리고 일광은 흰 닭을 손에 쥔 채 흐느적거리며 덩실덩실 댄다. 관객은 '효진이를 살리려고 일본인에게 살을 날리는 장면이다'라고 생각하며 본다. 일광이 그렇게 주장하기도 했고 아직까지는 그 놈하고 한 패인 줄 모르니까. 앞서 일본인과 관련된 동물은 하나같이 검은색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가 키우던 개나 집안으로 들어온 까마귀, 협박하고 자기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대문에 매달아 놓았던 염소까지 마찬가지다. 심지어 같은 시간 의식을 거행하며 희생의 제물로 바쳐지는 닭까지 검은색이다. 그에 반해서 일광은 살을 날릴 때 철저히 흰 생물을 대상으로 한다. ‘흰 닭’과 ‘흰 염소’ 이것들은 살의 방향이 효진이를 향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아마 이 굿 판은 최후의 일격으로 흰 염소를 죽이는 것으로 끝나게 되어 있었겠지만 그 전에 종구가 깽판을 놓으면서 임무는 완성되지 못했다.

일광은 마을의 수호를 상징하는 장승을 칼로 찍어 부러뜨리고 정을 박아 살의 강도를 점점 높여간다. 이 때 나오는 장면들이 관객들에게 혼동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일본인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데 효진이는 왜 그렇게 울부짖으며 아파하는 건지 어리둥절하는 분들이 많았을 것이다. 정을 박는 장면에서 쭉 이어지는 편집을 보면 매우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피범벅이 된 실내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축 늘어뜨린 채 탈진한 듯 앉아있는 쇼트를 기준으로 정으로 공격하는 내용이 앞과 뒤로 나뉜다. 앞 장면은 정을 박을 때마다 타격 받는 대상이 철저히 효진만 나온다. 즉 교차편집에서 일본인은 나오지 않고 효진만 등장한다. 사실상 이 편집의 어법은 ‘살’의 대상이 효진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런데 감독은 탈진한 듯한 장면 이후 정에 의한 공격이 재개될 때 일본인과 효진이 타격 입는 모습을 교차편집으로 동시에 보여준다. 관객은 효진이와 일본인이 아파하는 것을 교대로 보게 되는데 이런 트릭은 일본인에게 살을 날린다고 생각하도록 오도할 가능성을 열어줬다. 다분히 의도한 편집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편집방식의 내적논리로 본다면 뒷 장면에서의 약간의 술수가 있다해도 큰 반칙은 아니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반 정도는 속임수라고 보는 이유는 무명과 관련된 편집 때문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 때 일본인이 받은 타격은 무명에 의한 타격이었을 것이다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타격을 가하는 주체는 둘 즉, 별개인데 그것이 교차편집으로 나오니까 동시 발생적인 것처럼 보이고 감독이 착각을 유도하는 것이 아닌가. 속임수가 아니라고 주장하려면 무명이 타격의 주체일 수도 있다는 쇼트를 최소한 한 번 이상 보여줬어야 했다. 그러다 모든 게 끝나고 일본인이 타격 입은 몸으로 툇마루에 쓰러졌을 때 희끄무리하게 걸어다니면서 쳐다보는 어둠 속의 무명이 등장한다. 이렇게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두 번의 쇼트로 마무리 하는 것은 관객 입장에서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감독이 술수를 써서 관객을 속였다라는 주장에 어느 정도는 수긍하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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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의 힘까지 빌려봤지만 소용없이 딸의 병세는 점점 깊어지고 종구는 신부님을 찾아간다. 종교에 기대서라도 해답을 구하고자 하는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부는 자신도 소문을 듣긴 했는데 어떻게 직접 보지도 않고 그 사람이 귀신이라 확신하냐고 되묻는다. 신부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믿음이야 말로 보지 않고 믿는 것이 진짜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던가. 보고 듣고 이해한다고 해서 믿거나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이해된다고 가르치는 기독교다. 그런 의미에서 신부의 말은 굉장히 자기모순적이다. 교회에서 할수 있는 일은 없다는 말을 듣고 딸을 가진 아버지는 절망한다. 답을 구하러 갔지만 종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영화에서 경찰, 병원, 종교 등 인간이 구축한 코스모스는(시스템,질서) 철저히 무기력하게 그려진다. 경찰은 괴질의 원인을 독버섯이라고 결론 내렸고, 병원은 이유를 모르겠다고 답했다. 카오스와 코스모스 사이를 우왕좌왕 하면서 종구는 이제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됐다. 세상이 답을 내려 주지 않는다면 이제 자신의 믿음에 확신을 가지고 그 왜놈을 처치하러 행동에 나서야한다. 반드시 딸을 살려 내야만 한다.


종구는 이제 그놈이 귀신인지 아닌지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 그 새끼가 귀신이라면 사람 손에 죽지는 않을 테니까. 양이삼을 데리고 친구들과 함께 다시 그놈의 집에 들이닥쳤다. 아무도 없는 집을 수색하다가 온몸에 피칠갑을 한 좀비같은 괴물과 마주쳤다. 왜놈이 주술을 써서 부활시킨 인간이다.


여기서 이놈과 한바탕 사투가 벌어지고 놈은 기운을 잃고 쓰러졌지만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그 때 멀리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왜놈과 시선이 마주치고 종구와 친구들의 살벌한 추격전이 펼쳐진다.


일본인은 쫓기다가 결국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비명을 지를 듯 고통스러워 하며 마치 신세 한탄을 하는 것처럼 슬프게 운다. 이 쇼트는 명백히 일본인이 처해진 상황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객관적 쇼트로써 영화 속 그 어느 누구의 시선도 아니다. 뒤에 이어지는 장면에서 무명의 시선은 일본인의 오른쪽으로 잡히기 때문이다. (관객이 보는 화면 기준으로는 일본인의 왼쪽) 아무도 보는 시선이 없는데도 고통스러워 하거나 슬퍼 우는 모습을 일부러 보여줘서 관객들을 낚고 있다. 혹시 그가 사람 아닐까? 억울하게 당하는 건 아닐까? 영화는 그가 인간성을 가진 존재임을 보여주면서 관객의 그런 의심을 겨냥하고 있다. 앞서 추격전이 벌어질 때 도망치면서 엉덩방아를 찧는다거나 넘어져서 구르거나 하는 모습들은 그가 신적인 존재임에도 특별한 능력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 초월적인 존재라면 왜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서 관객들을 헷갈리게 만드는걸까?

이것 역시 기독교적 레퍼런스와 관련성이 있다. 신적인(초자연적) 존재가 육체를 온전히 가지고 있다 것은 결국 예수의 이야기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라는 존재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지만 예수는 완벽한 인성과 신성을 함께 갖춘 사람이자 신이라고 결론지었다. 예수는 33년 간 지상에 머무를 때 바늘에 찔리면 아파하기도,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위해 슬퍼 울기도 한 사람이었다.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마치 하나님을 원망하는 듯한 뉘앙스의 말을 하기도 했다. 나약한 인간 존재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러나 완벽한 인성을 가진 게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라는 게 기독교 신학의 결론이다. 영화 속의 ‘악마적 존재’ 일본인 캐릭터가 바로 그런 존재로 묘사된다.


무명과 일본인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되고 종구가 몰던 차는 빗길에 미끄러져 사람을 치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일본놈이었다. 추격전 끝에 절벽 아래로 떨여져 차에 치이게 된 것. 종구와 친구들은 그를 깊은 골짜기 밑으로 굴러 떨어뜨림으로써 생명을 완전히 거둔다. 끝도 없이 하강하는 이미지 속에서 인성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삶은 종언을 고한 것이다. 그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는 무명의 쇼트가 길게 이어진다. 그는 실제로 죽었고 이 영화가 차용한 기독교적 레퍼런스에 비추어 3일 만에 부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굴에서 부활한 이야기는 영화 종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자세하게 다룰 예정이다.


“버럭지 같은 놈이 미끼를 삼켜부렀구마이” 이어지는 장면에서 일광의 한 마디는 의미심장하다. 미끼를 물고 삼켜버렸다는 것은 어쩌면 예정된 수순을 그대로 밟아나간다는 뜻, 일본인이 죽고 부활해서 이후의 일들을 할 수 있게 종구 자신이 정해진 역할을 하고있구나라는 말처럼 들린다. 또는 미끼를 완전히 삼켜버렸으므로 이제는 완전히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으로 빠졌구나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미끼를 물고 있을 때는 발버둥치다가 바늘이 빠질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삼켜버린 이상 그 어떤 희망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구를 만나려고 집으로 찾아갔다가 무명을 만난 일광은 폭포수처럼 핏물을 토해내고 휘청거린다. 신통력이 이런 식으로 작용 했다는 것은 그가 무명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임을 잘 보여준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일본인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무명과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 일광은 그 일본인과 한패다.

겁에 잔뜩 질린 그는 집에서 물건을 이것저것 챙겨 도망을 가는데 날벌레 떼의 습격을 받아 차의 방향을 돌린다. 영화를 다 보고나면 알 수 있지만 이 때의 신통력은 부활한 일본인의 능력이라고 봐야한다. 왜냐하면 곡성으로 돌아가 마무리해야할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피하고 도망치는 일광을 부활한 그가 돌려 세운 것으로 보인다.

도망가려던 길과 곡성으로 돌아가는 뱡향을 응시하고 있는 일광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긴다. 가뿐 숨을 몰아쉬는 일광의 표정에서 묘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양이삼은 삼촌 오성복이 마을에 번지는 괴질에 걸려 살인을 저지르자 정체를 묻기위해 일본인을 찾아간다. 영화 종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양이삼은 무명과 교차편집 되면서까지 중요하게 등장한다. 어떻게 보면 메인 스토리에서 벗어나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적으로 힘을 주는 이유는 이 영화가 믿음에 관한 내용을 서브테마로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종구는 무명이 귀신이라는 말을 일광한테 듣고 급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일광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 종구를 낚고 관객을 낚고 있다. 효진이가 집에 안보이자 딸을 찾아 이리저리 헤메다가 무명과 마주쳤다. 덫을 쳐놨으니까 귀신이 잡힐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라는 그녀의 말에 종구는 정체를 묻는다. “사람이여 귀신이여?” 그것을 왜 묻냐는 되물음에 종구는 대답한다. “나가 그것을 알아야 니말을 믿을거 아니냐” 무명曰 “그냥 믿어”

살인사건 현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무명은 왜라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었다. 명확한 이유와 인과관계를 들어 하나의 대답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 종교의(질서) 핵심과 닿아있다. 무명이 상징하는 자연의 섭리는(코스모스) 그냥 믿으라 한다. 그러나 그 말은 종구에게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종구는 이해가 안되면 믿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종구는 일본놈이 귀신이라고 하는데 그 놈이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물었다. 그 말은 왜 하필 우리 딸이냐는 질문과 같다. “니 딸 애비가 죄를 지었응께. 남을 의심하고 죽일려커고 결국엔 죽여부렀어.” 무명은 고통과 불행의 원인에 대해 설명했다. 하나의 대답을 들었지만 종구는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 그녀의 대답은 인과관계가 뒤집혀 있기 때문이다. 무명이 죄로 언급한 내용은 다 딸이 아파서 그랬던 일들이다. 불가해한 답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거대한 폭력과 다름없다.

무명과 일광 서로가 상대방을 믿지 말라고 하는 상황에서 종구는 이제 아무도 믿을 수 없다. 그런데 조금 전 무명이 서있던 자리에서 딸의 머리핀을 발견하고는 이 모든 일들이 무명의 짓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선택의 순간 결국 집으로 달려 간 것은 일광을 신뢰해서가 아니라 본인의 판단과 확신을 믿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처음 본 관객들은 아마 이 장면에서 무명, 일광 양쪽을 두고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 지 깊은 갈등을 느꼈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도 역시 기독교적 레퍼런스를 가져와 활용한 흔적이 있다. 닭이 세 번 울 때까지만 참으라는 내용은 닭이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 이야기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죄다 니 짓이구만”이란 종구의 물음에 이를 세 번 부인하는 상대가 무명인 점이 매우 흥미롭다. 기독교 이야기를 가져와서 영화의 상황과 설정에 맞게 변주한 것이다. ‘무명 베드로’설을 주장하는 것은 영화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내용을 풍부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차용했을 뿐 그 속에 담긴 일대일 관계를 찾는 것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양이삼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 일본인과 마주한다. 여기서 그가 부활한 장소가 동굴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동굴은 예수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한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 한 후 동굴 안에 매장했다. 그를 따르던 여자들은 시신이라도 수습하려고 새벽에 동굴로 갔는데 앞을 막아뒀던 큰 돌이 없어지고 예수의 시신도 사라져 버렸던 것. 그래서 깜짝 놀라던 중에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의 부활을 알려줬다. 동굴이라는 장소를 일본인의 부활과 관련해서 등장시킨 것은 이러한 맥락이다. 

양이삼은 그에게 정체를 물었고 니 생각은 뭐냐는 질문이 되돌아 왔다. “악마” 그는 양이삼에게 넌 의심을 확인하러 왔고 내가 누군지 내입으로 아무리 말해봤자 믿지 않을 거라고 했다. 즉 믿음이란 본인이 확신하는 만큼 눈에 반영되어 그대로 보인다는 뜻이다. 양이삼은 그가 악마라고 확신했고 그것은 낫을 들고 찾아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장면이 굉장히 역설적이다. 믿는대로 보이는 거라면 너는 누구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셈이 되기 때문이다. ‘악마’라는 단어는 사실 동굴 장면에서 처음 나왔고 클라이맥스에서 무명과 종구는 여전히 그를 ‘귀신’으로 지칭한다. 종구가 만약 동굴에 들어왔다면 본인이 의심하고 확신하는 귀신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다른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이 들어갔다면 각자가 생각하는 모습대로 보여졌을 것이다. 양이삼이 믿는 악마의 형상은 누런 이빨과 긴 손톱과 붉은 눈을 가진 그야말로 기독교적 악마의 모습 그대로였다.

영화에서 부활한 악마를 혼자 대면하는 인물이 왜 양이삼일까?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가 가톨릭 성직자이기 때문이다. 양이삼의 의심과 믿음의 문제를 건드리면서 그가 믿고 상상하는 악마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관객들에게 강렬한 시각적 충격을 줬다. 악마의 입에서 나온 누가복음 말씀 역시 양이삼이 그를 대면했기에 가능했던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누가복음에 있는 예수의 말을 떠올리고 더더욱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화 첫 장면과 이 장면에서 두 번 씩이나 중요하게 다뤄질 수 있었다.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부활한 그는 신적 존재를 드러냄과 동시에 가장 사악하고 무서운 기독교적 악마의 형상으로 예수가 한 말을 내뱉는다. 영화는 대담한 상상의 결과물을 보여준다.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경스러운 장면이다. 해석하기 따라서는 교회가 예수라는 가면을 벗고 추악한 얼굴을 드러냈을 때 이를 용인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까지 건드리고 있다. 영화의 핵심은 아니겠지만 믿음의 문제를 서브테마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알려진 3년 간 행적에서 수없이 많은 병을 고쳤다. 그런데 이 기독교적 악마는 정반대로 병을 내리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반기독교적 정서를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누군가는 이런 식의 표현이 매우 흥미롭게 보이겠지만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매우 불편하고 강한 거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금어초가 말라 비틀어졌다. 무명이 쳐 놓은 금줄을 넘어가는 순간 종구의 집안에 죽음이 내린다. 혈흔이 낭자한 부엌에 들어서서 아내를 발견하고 오열한다. 딸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 했지만 돌아오는 건 피할 수 없는 죽음 뿐이었다. 마지막에 무명을 신뢰했다면 화를 피할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은 무의미하다. 영화의 핵심에서도 한참 벗어나 있다. 어차피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고 종구는 본인 스스로의 판단을 믿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칼을 맞고 쓰러져있는 종구를 향해 셔터를 눌러대는 일광. 부활한 악마가 사용한 것과 같은 미놀타 카메라다. 그 일본놈과 일광은 한패였다. 미끼를 물고 삼킨 효진이와 그 가족들을 처치하기 위해 끊임없이 종구를 낚고 관객을 낚았다. 이로써 일광은 악마가 지시한 임무를 완수했다. 이 모든 재앙, 불행, 고통, 죽음에는 이유가 없다. 그야말로 카오스의 무질서, 공포 그 자체다.


카오스와 코스모스 사이에서 갈등하며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처참한 비극을 맞았다. 딸을 위해서 본인을 믿고 할 수 있는 건 다해봤지만 인간의 힘으로 불행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우연일 뿐 인간의 잘못이 아니다. 마지막에 종구를 완전히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은 감독의 배려일 수 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이런 감독의 마음을 알아채고 위로를 받을런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하기도 했고 영화 속 재앙이 마치 자연재해처럼 묘사되는 측면도 있기 때문.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일방적으로 당하는 종구는 너무 무기력해 보인다.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종구와 다른 모든 피해자 들에게 이 영화는 진심으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평론

〈곡성〉은 신비주의나 초자연적 현상을 소재로 하는 오컬트 장르 영화다. 이 장르는 악마나 묵시록 등의 기독교적 세계관과 악령을 쫓는 엑소시즘이 핵심이다. 〈곡성〉은 장르적으로 오컬트에 무속적 세계관을 접목시켜 신선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를 활용하여 화려하고 다양한 볼거리를 만들어냈다.

특히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동굴 속 장면은 마치 독립된 이야기인 것처럼 시각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가톨릭 성직자의 믿음에 관한 문제를 건드리면서 신적 존재에 대한 인식론까지 나아간다. 신은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신에 대한 믿음은 과연 무엇인가? 인간은 신적 존재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가? 이해할 수 없다해도 믿을 수 있는가? 믿음으로써 이해된다는 것은 정말 그러한가?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가? 등등 수많은 질문들을 관객들에게 던진다.

〈곡성〉의 플롯은 빈칸이 많아서 사건의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힘들다. 그런데 이 영화가 대단한 것은 영화를 다 보고나면 관객 스스로가 그 공백을 채우고 이야기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런 방식의 이야기 구성은 스토리의 양 갈래에서 관객의 선택을 묻고 갈등하게 만드는데 효과적이다. 그 과정에서 최대한의 재미를 끌어내기 위함으로 보인다. 일광이 살을 날리는 대상이 효진일까 일본인일까? 일본인은 사람인가 신인가? 무명과 일광 둘 중에 누구 말을 믿어야 할까? 영화의 힘은 생략하는 데서 나온다.

〈곡성〉은 미지의 존재와 금기에 대한 공포를 다루면서 악마의 실체를 현실세계로 소환했다. 영화가 이토록 강력한 힘과 에너지를 뿜어내는 것은 관념적이고 실존적 이야기를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결국 삶의 중요한 부분과 맞닿아 있어서 극장에서 나서자마자 내용을 곱씹게 하고 고민하게 만든다. 그런 측면에서 〈곡성〉은 굉장히 훌륭한 영화다.

〈곡성〉의 주인공 곽도원(종구) 배우의 연기는 탁월하다. 덩치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행동이 굼뜨고 움직이길 싫어하고 소극적인 사람이다. 이런 평범한 보통사람이 어떤 일을 당했을 때 '반응하는 연기'를 아주 훌륭하게 소화해낸다. 딸을 살리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활발한 움직임은 그래서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영화의 주제와도 밀접한 선택이다.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력한 인간의 실존적 비극을 보여주는 최적의 연기를 선보였다. 

이 영화에서 일본인은 굉장히 이해하기 어려운 캐릭터다. 악의 존재를 우리의 이해 영역 바깥에 두고 갑자기 삶 속으로 끼어드는 설정을 보여준다. 어디서 왜 왔는지 왜 불행을 퍼트리는 지 이유도 없다. 이런 이상한 상황 가운데 ‘악’이란 인간이 겪어내야하는 실존적 삶의 조건으로 그리고 있다. 대부분의 영화나 소설이 인간 내면의 악마성에 대한 성찰과 이해 정도로 다루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그 공포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 인간은 그것을 이해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끝내 좌절하고 마는, 인간의 무력함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덧 붙이는 말

〈곡성〉을 처음 관람했을 때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기분이 나쁘면서도 이 영화가 알 수 없는 강한 힘과 에너지를 갖고 있음을 느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영화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살펴보면서 평소에 가지고 있던 궁금증이 해소되어 지금은 개운하고 홀가분한 기분이다. 〈곡성〉은 뚜렷한 영화적 성취를 이뤘을 뿐만아니라 관객들에게 생각하고 고민할 거리들을 많이 남겨줬다. 그것들이 삶의 자양분이 되어 끊임없이 성찰하게 하고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해준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훌륭하고 좋은 영화이다.

이 글을 쓰기 전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곡성〉에 대한 거의 모든 해석, 리뷰, 평론 등을 다 살펴봤다. 영화가 난해한 만큼 리뷰나 해석 역시 사람마다 다 제각각이고 그 중에는 관념적으로 빠져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글들도 상당수 있었다. 평론이 재미있는 이유는 정답이 없어서다. 그 어떤 것도 모범답안이 될 수 없기에 평론가의 글도 하나의 의견에 불과하며 그것은 내 글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 이동진 평론가의 의견을 기반으로 내 생각을 덧칠하고 추가하여 쓴 글임을 미리 밝혀둔다. 이 글은 한 마디로 지금까지 웹 상에 있는 모든 글을 읽고 내 나름대로 정리한 〈곡성〉의 이해와 감상 종합판이다. 재미와 이해를 더하려고 영상, 사진, 글 텍스트를 함께 실었다. 지금까지 나온 그 어떤 글과 비교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지인 작가, 평론가
destiny2135@gmail.com

= 참고 =

[무비딥] 이동진의 끝장 평론 ‘곡성’ 대해부


어린지인 영화 평론

영화평론 〈곡성〉 이해와 감상 - 상편

2019. 3. 12. 17:05

장면에 대한 언급 없이 영화의 이해와 감상을 논하는 것은 허구라고 생각합니다.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누가 복음 24장 37-39절


정체를 모르는 인간이 낚시질을 하고 있다. 미끼를 덥썩 물어 낚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미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어느새 허우적 대고 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밖을 나서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얼얼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재구성하게 만드는 〈곡성〉은 그런 영화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괴질이 마을을 습격한다. 심각한 피부병과 함께 정신질환을 동반하고 끔직한 죽음을 불러 일으키는 병이 마을 전체에 서서히 퍼지고 점점 종구의 가족을 향해 과녁을 좁혀온다. 딸이 병에 걸리자 종구는 지금 벌어지는 상황이 정확히 뭔지 어떤 의미인지 모르면서도 갈팡질팡 죽기살기로 뛰어다닌다.


끔찍한 살인이 벌어진 현장에서 종구는 해골모양으로 말라 비틀어진 ‘금어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홀린듯 손을 뻗어 만지려고 한다. 집안에 죽음을 내리는 의미로 사용되는 ‘금어초’는 영화 종반부에 종구가 대문에 쳐놓은 금줄을 넘어갈 때 순식간에 말라 비틀어지면서 섬뜩함을 더해준다.


오성복은(동료경찰) 이 모든 일들이 그 일본인이(외지인) 오고나서 생긴 일들이라고 말한다. 종구는 독버섯을 먹고 생긴 일이라는 경찰 발표를 믿는 듯하다가 그럴리가 없다는 동료의 말에 ‘의심’쪽으로 서서히 마음이 기운다. “요렇게 소문이 파다하면 말여 무신 이유가 있는거여 이유가.” 사실 마을에 내린 재앙과 일본인 사이에는 심증만 있을 뿐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이해가 안되는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끊임없이 시도하는 존재이다. 마음에 의심이 내려앉은 그 순간 갑자기 벼락이 치면서 전기가 나간다. 그 때 머리를 풀어헤친 채 나체로 서있는 여자를 목격하면서 두 사람은 기겁한다.


이때부터 종구는 악몽에 시달리고 집안에 재앙이 시작된다. 의심이 마음에 자리잡자마자 시작된 불행. 이 영화는 믿음의 문제를 건드린다. 이 시점에 사실상 효진이 일본인한테 어떤 식으로든 범해졌다고 봐야한다. 그런 추측을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효진은 부모의 성관계 장면을 목격하고도 놀라거나 피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문을 열고 차 안으로 불쑥 들어오려고 하는데 이는 성적 상상을 자극한다. 머쓱한 종구는 딸을 데리고 나가 문구점에서 머리핀을 비롯한 갖가지 물건들을 잔뜩 사준다. 그 다음 이어지는 장면이 재밌다.


종구는 딸한테 넌지시 묻는다. “언제부터 봤냐? 응? 어디까지 봤는디?” “걱정말어. 암말 안할랑께” “봤네. 다봤네” “걱정말라고 첨본 것도 아니여.” ??!!! 효진한테는 이 순간 이미 성관계가 낯선게 아니라 익숙한 것으로 그려진다. 실제로 많이 봐와서 그랬을 수도 있고 이미 일본인한테 범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후자 쪽에 무게를 싣는 입장이다. 딸이 모든걸 다 봐버렸다고  고개를 푹 숙이는 종구. 그런 아빠한테 효진은 “괜차네 먹어”하며 음료를 내미는 상황에서 어른과 아이 역할은 완전히 뒤집힌다. 즉 효진이 어른같고 종구가 아이같다는 것. 다시말해 효진은 어른 입장에서 성관계는 익숙한 거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강 맞은 편에 앉아 낚시하는 일본인을 롱쇼트로 보여준다. 예사롭지 않은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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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두 번째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집은 불타버린 채 유력한 용의자였던 안주인은(아주머니) 목이 매달려 죽은 시체로 발견됐다. ‘무명'은(천우희) 마치 범행을 옆에서 목격한 듯 종구한테 자세하게 설명을 늘어놓는다. 그러다가 대뜸 그 왜놈이 귀신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사라져버렸다. 왜놈에 대한 의심은 이제 확신으로 굳어졌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그 왜놈이다.' 그 순간 동물의 사체를 뜯어먹고 있는 악마같은 형상의 왜놈과 맞닥뜨리게 된다.


여기서 ‘무명’은(천우희) 대체 누구인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무명(無名)'은 말 그대로 이름이 없는 무엇이다. 어떤 대상이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정체성을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초월적 존재이므로 이름이 없는 것이다. 그녀는 마을과 인간 세상을 굽어 살피는 초자연적 신으로서 일종의 수호신이다. 초월적 존재로서 영화에 직접 등장하는 횟수는 적은 편이다. 하지만 영화에 공백이 있어도 우리가 그녀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지 않는 것은 초월적 시선으로 자연을 내려다 보거나 마을을 살피는 시점쇼트로 사실상 대체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렇게 언제나 존재감을 드러낸다.


악몽의 강도가 점점 세지고 딸까지 아파서 몸져눕게 되자 종구는 일본인에 대한 소문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건강원을 찾아간다. 건강원 주인은 산 속에서 일본인이 고라니를 생으로 뜯어먹고 있었다는 목격담을 들려준다. 종구는 말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증거 있냐고 묻는다. 그러자 증거라며 텅 빈 냉장고를 보여주는데 이 장면이 예사롭지 않다. ‘카오스(chaos)’는 의성어에서 온 말이다. 하품을 하면서 ‘카오스’라고 발음해보자. 입이 넓어지면서 속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 텅 빈 공간을 의미하는 카오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태초의 모든 것의 시작으로 설명한다. 건강원 주인은 일본인이 사람이 아니라며 눈으로 직접 본 것을 증언하고 텅 빈 공간을 증거로 제시한다. 코스모스(질서)에 대응하는 카오스(무질서)로서 일본인의 정체를 설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종구는 건강원 주인의 증언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함께 일본인 집을 찾아나선다. 일본인이 고라니를 생으로 뜯어먹었던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뒤 세 사람은 공포에 질리고 그 때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건강원 주인은 겁에 질려 돌아가려 하자 종구와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고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흙 범벅이 된 몸을 일으켜 산으로 내려가려고 하는 순간 그는 벼락을 맞고 다시 쓰러진다. 몸소 하려고 했던 증언을 회피하고 도망치려고 하자 자연신인 무명이 천벌을 내린 것으로 충분히 해석이 가능한 장면이다.


“누가 자꾸 문을 두들기고 자꾸 들어올라켜, 어떤 아재가 자꾸 들어올라켜” 밤새 고통에 울부짖던 효진이가 평소에 좋아하지도 않은 생선을 엄청나게 먹어치우고 있다. 여기서 악령이 들린 것으로 보이는 효진이 허겁지겁 먹는 게 ‘생선'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면 부활한 예수를 만난 두 제자가 육체가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고 나서 대접한 음식이 생선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예수가 생선을 먹는다는 것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며 이는 초월적인 존재가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악령이 들린 효진은 일본인과 연결되고 그가 생선을 먹는 다는 것은 신적 존재임과 동시에 육체적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기독교적 레퍼런스를 끌고 들어와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 집에 다시 찾아가 보기로 한 날, 오성복은(동료경찰) 조카 ‘양이삼’을 데리고 왔다. 양이삼은 가톨릭 신부를 보좌하는 부제이다. 아직 정식 사제가 아닌 그래서 인간의 때를 완전히 벗지 못한 어중간한 인물이다. 그가 통역자라는 특징은 가톨릭 성직자인 것과 사실상 같은 의미다. 언어가 달라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매개해주는 역할과 신의 대리자로서 신과 인간사이를 매개해 주는 것은 비슷한 맥락이다. 종구는 이름을 묻고 그는 “양이삼이요”라고 대답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종구가 차를 향해서 가다가 “본명이여?”라고 묻는다. 이름마저 사람 이름 같지 않고 어중간하다는 뜻이다.

영화적으로 이름에 악센트가 주어져 있는 이 장면에서 혹시 이름에 기독교적 레퍼런스가 담겨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양. 이. 삼. 숫자의 향기가 강하게 느껴지는 이름에서 ‘223’ 2가 두개고 3이 하나, 그래서 22장 3절. 공포영화나 묵시록적인 상황에서 자주 인용되는 요한계시록이 떠오른다. 요한계시록 22장 3절 ‘다시는 저주가 없고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그 안에 있을 것이며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리니’ 나홍진 감독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피해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위로하기 위해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즉 양이삼이라는 이름에 '다시는 저주가 없다'는 의미를 넣고 그를 희생시킴으로써 바람을 실현시키고자 한 의도가 아니었을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측이며 하나의 견해로써 충분히 즐기시기를 바란다.


처음 찾아간 일본인의 집에서 밀실을 발견한 오성복은 크게 놀란다. 그 좁고 어두운 공간에는 그동안 희생된 사람들의 사진들로 빼곡하게 차있고 그러는 사이 종구와 양이삼은 검은개랑 한바탕 소동을 벌인다. 일본인이 집에 돌아오자 개는 흥분을 멈추고 셋은 왜놈을 맞닥뜨린다. 무단침입을 하면서까지 방을 뒤졌던 그들은 죄인 얼굴을 하고 도망치듯 그 집을 빠져나왔다. 네팔의 샤머니즘에는 무당이 좁은 공간에 들어가 촛불을 켜고 그 안에서 은밀한 의식을 하는 방식이 많다고 하는데 이를 취재하기 위해 감독이 직접 네팔로 날아갔다고 한다. 이렇게 일본인과 네팔의 샤머니즘을 접합시켜서 혼종적이면서도 이색적인 볼거리를 만들어냈다.


차 안에서 오성복은 그 왜놈이 범인임을 확신하고 비에 흠뻑 젖어 넋이 나간 얼굴로  종구한테 효진이 실내화를 건넸다. 종구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실내화를 들고 가서는 딸한테 물었다. 동네에 일본사람 아냐고 어디서 만나서 뭘 했냐고 다그치며 물었다. “나가 왜 말해야 되는디?” “중요한 문젠께” “뭣이 중헌디” 이 장면에서 2016년 최고의 영화대사가 탄생했다. 뭣이 중하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연출에서 나는 정신적 쇼크를 받았다. 악령에 씌여 마치 존재 자체가 역전된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장면은 두 사람이 부녀관계라서 더 충격이 심했다. 딸의 가장 극적인 순간에 딸의 입으로 그 대사를 말하게 함으로써 큰 효과를 가져왔다. “뭣이 중헌디”라는 대사는 그 자체로 굉장히 인상적인 동시에 영화적으로도 훌륭한 대사라고 할 수 있다. 가족에게 닥친 모든 불행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사투를 벌이지만 결국 ‘뭣이 중헌지’ 몰랐던 한 남자의 무력감을 토로하면서 영화가 끝나기 때문이다. 짧은 대사에 주제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은 그것이 훌륭한 대사임을 증거한다.


효진이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자 종구는 양이삼을 데리고 일본인을 또 찾아간다. 여권을 살펴보며 사진을 찍는데 휴대폰 액정을 자세히 보면 일부러 일본인의 얼굴이 나오게끔 각도를 돌려 찍는다. 영화 후반부에 종구가 일본인을 치여 죽이게 되는 장면을 떠올려 보면 산 사람의 사진을 찍고 그 사람을 죽이는 영화의 설정을 종구가 그대로 되풀이 하는 점이 흥미롭다. 


여기 뭐 하러 왔냐고 넌 누구냐고 종구가 물었지만 일본인은 말해줘도 믿지 못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초월적 존재를 인간이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떠나라는 말에 대꾸를 하지 않는 일본인을 보고 화가난 종구는 곡괭이로 방을 때려 부수고 그가 키우던 검은색 개까지 때려 죽였다. 그러면서 3일 안에 짐 챙겨서 떠나지 않으면 죽인다고 경고했다. 3이라는 숫자와 죽음은 기독교에서 가져온 내용으로 보인다.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는 예수의 이야기는 하나의 복선으로써 일본인의 운명에 그대로 적용된다고 봐야한다. 


일본인은 염소의 사체를 대문 앞에 매달아 존재를 드러낸다. 일종의 경고 메시지다. 앞으로 또 설명하겠지만 이 영화에서 일본인과 관련된 동물은 죄다 검은색 계통으로 등장한다. 검은색 개, 까마귀, 닭, 염소 등이다. 색깔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 영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아침에 한바탕 소동 때문에 일어나다가 넘어진 종구는 한의원에 침을 맞으러 가고 그 사이 잠시 옆집 할머니 댁에 딸을 맡겼다가 또 난리가 났다. 이제 어떻게든 뭐라도 해야한다.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이 집으로 찾아오고 가족의 생사를 위협한다면 어떻게든 발버둥쳐야 한다. 뭐든 해야만 하는 간절함이 극대화되는 시점에 영화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으로 완전히 새 국면을 맞는다.


마치 굿 판이 벌어지는 듯한 음악이 웅장하게 깔리면서 일광(日光)이 등장한다. 이 장면에서 황정민(일광)이라는 배우가 가진 존재감은 가히 압도적이다. 굽이굽이 비탈진 산길을 헤치고 곡성으로 내려가는 것은 마치 어떤 초월적 존재가 인간세상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지인 작가,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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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지인 영화 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