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진이네 집 앞에서 한바탕 굿 판이 벌어지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은 마치 카메라 필터 효과같은 느낌으로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징, 꽹과리, 북, 피리 소리가 비명소리와 함께 어지럽게 뒤섞이며 효진이는 이내 쓰러지고 만다. 이 장면에서 황정민과 김환희양이 보여주는 연기는 '신 들렸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마치 악령이 든 아이와 무당에 각각 빙의된 듯 어우러지는 연기 앙상블은 관객을 그대로 빨아들인다. 나는 강력한 사운드와 이미지가 주는 충격 때문에 잠시 정신이 아찔해지고 숨이 막히는 듯 했다. 시골 사람들한테는 무속적 세계관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곡성(哭聲)’을 배경으로 무속을 가져와서 낯설지도 모르는 관객들에게 거부감 없이 다가가게끔 만들었다.
일광은 효진을 만져보더니 자신이 지금까지 본 악질 중에 갑 중에 갑이라면서 누굴 만난 적 있냐고 종구에게 물었다. 종구가 일본사람을 만났다고 실토하자 일광은 말했다. “그 양반 사람 아니여. 그 양반 귀신이여.” 영화를 처음 볼 때 제대로 낚였던 장면이다. 마을의 이 모든 원흉이 일본인 때문이니까 무당이 당연히 그놈을 퇴치하러 왔겠지 싶었다. 일본인의 정체와 둘 사이의 관계를 정확하게 모르는 상황에서 관객은 속을 수밖에 없다.
종구는 일광(日光)과 함께 그의 집에 찾아가서 굿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대화가 끝나고 종구가 일본놈에 대해 질문하는 그 순간 일광은 훈도시를(일본 성인 남성이 입는 전통 속옷) 입고 있다. 이 장면은 명백히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눈치 빠른 사람은 이 인물이 일본놈과 어떻게든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즉 이 모든 것들이 큰 그림을 위한 낚시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생긴다.
일본놈이 귀신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산 사람이 귀신이라는 건지 이해가 잘 안된다고 종구가 묻자 일광은 알 수 없는 대답들만 쭉 늘어놓는다. 귀신이 들린 거라면 왜 하필 우리 딸이냐고 묻자 일광의 대답이 걸작이다. “고놈은 낚시를 하는 거여. 뭐가 딸려 나올지는 몰랐겄재 지도. 고놈은 그냥 미끼를 던져분 것이고 자네 딸내미는 고것을 확 물어분 것이고. 고것이 다여.” 즉, 너의 불행은 다 우연일 뿐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카오스는(무질서) 답을 하는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설명을 들었지만 종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딸이 죽을 지도 모르는데 이유가 없다니 이게 말인가 막걸리인가. 불행과 고통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유를 묻게 만든다. 인간은 필사적으로 해답을 갈구하지만 돌아오는 건 공허한 메아리 뿐이다. 일광은 종구를 낚고 또 관객들을 열심히 낚고 있다.
일본인은 폭포수를 맞으며 기를 한껏 모으고 있다. 어떤 의식을 거행하기 전에 몸을 정갈하게 하고 정신을 가다듬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것을 멀리서 빼꼼히 쳐다보는 무명. 그녀는 이미 이 때 일본인이 사는 곳 근처에 와 있다. 앞으로 이어지는 장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명이 어디에 있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왜놈은 죽은 사람을 소생시키는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나중에 이 사람은 악귀같은 괴물의 형상으로 종구 일행을 습격한다. 살아나기는 했지만 좀비처럼 끔찍한 모습으로 시각적 충격을 준다. 예수가 죽은 자를 살린 기적을 영화 속에서 이런 식으로 전복시키기 때문에 반기독교적 정서가 도저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인 캐릭터는 무속적 세계 속에 기독교적 세계관을 집어 넣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어색한 듯 보이지만 의외로 두 세계는 쉽게 잘 붙는다. 왜냐하면 무속의 토양 자체가 흡수력이 높고 단일한 하나의 믿음 체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당 중에는 관우, 무열왕, 맥아더 장군 심지어 예수까지 모시는 분들이 있다. 무속은 이렇게 여러가지를 끊임없이 먹어치우며 발달한 일종의 종교다. 그래서 내부의 질서가 없는 ‘카오스’로 해석하는 것도 크게 무리가 없다.
같은 시각, 효진이네 마당에서는 살을 날리는 위험한 굿 판이 열리고 일광은 흰 닭을 손에 쥔 채 흐느적거리며 덩실덩실 댄다. 관객은 '효진이를 살리려고 일본인에게 살을 날리는 장면이다'라고 생각하며 본다. 일광이 그렇게 주장하기도 했고 아직까지는 그 놈하고 한 패인 줄 모르니까. 앞서 일본인과 관련된 동물은 하나같이 검은색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가 키우던 개나 집안으로 들어온 까마귀, 협박하고 자기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대문에 매달아 놓았던 염소까지 마찬가지다. 심지어 같은 시간 의식을 거행하며 희생의 제물로 바쳐지는 닭까지 검은색이다. 그에 반해서 일광은 살을 날릴 때 철저히 흰 생물을 대상으로 한다. ‘흰 닭’과 ‘흰 염소’ 이것들은 살의 방향이 효진이를 향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아마 이 굿 판은 최후의 일격으로 흰 염소를 죽이는 것으로 끝나게 되어 있었겠지만 그 전에 종구가 깽판을 놓으면서 임무는 완성되지 못했다.
일광은 마을의 수호를 상징하는 장승을 칼로 찍어 부러뜨리고 정을 박아 살의 강도를 점점 높여간다. 이 때 나오는 장면들이 관객들에게 혼동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일본인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데 효진이는 왜 그렇게 울부짖으며 아파하는 건지 어리둥절하는 분들이 많았을 것이다. 정을 박는 장면에서 쭉 이어지는 편집을 보면 매우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피범벅이 된 실내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축 늘어뜨린 채 탈진한 듯 앉아있는 쇼트를 기준으로 정으로 공격하는 내용이 앞과 뒤로 나뉜다. 앞 장면은 정을 박을 때마다 타격 받는 대상이 철저히 효진만 나온다. 즉 교차편집에서 일본인은 나오지 않고 효진만 등장한다. 사실상 이 편집의 어법은 ‘살’의 대상이 효진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런데 감독은 탈진한 듯한 장면 이후 정에 의한 공격이 재개될 때 일본인과 효진이 타격 입는 모습을 교차편집으로 동시에 보여준다. 관객은 효진이와 일본인이 아파하는 것을 교대로 보게 되는데 이런 트릭은 일본인에게 살을 날린다고 생각하도록 오도할 가능성을 열어줬다. 다분히 의도한 편집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편집방식의 내적논리로 본다면 뒷 장면에서의 약간의 술수가 있다해도 큰 반칙은 아니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반 정도는 속임수라고 보는 이유는 무명과 관련된 편집 때문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 때 일본인이 받은 타격은 무명에 의한 타격이었을 것이다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타격을 가하는 주체는 둘 즉, 별개인데 그것이 교차편집으로 나오니까 동시 발생적인 것처럼 보이고 감독이 착각을 유도하는 것이 아닌가. 속임수가 아니라고 주장하려면 무명이 타격의 주체일 수도 있다는 쇼트를 최소한 한 번 이상 보여줬어야 했다. 그러다 모든 게 끝나고 일본인이 타격 입은 몸으로 툇마루에 쓰러졌을 때 희끄무리하게 걸어다니면서 쳐다보는 어둠 속의 무명이 등장한다. 이렇게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두 번의 쇼트로 마무리 하는 것은 관객 입장에서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감독이 술수를 써서 관객을 속였다라는 주장에 어느 정도는 수긍하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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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의 힘까지 빌려봤지만 소용없이 딸의 병세는 점점 깊어지고 종구는 신부님을 찾아간다. 종교에 기대서라도 해답을 구하고자 하는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부는 자신도 소문을 듣긴 했는데 어떻게 직접 보지도 않고 그 사람이 귀신이라 확신하냐고 되묻는다. 신부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믿음이야 말로 보지 않고 믿는 것이 진짜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던가. 보고 듣고 이해한다고 해서 믿거나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이해된다고 가르치는 기독교다. 그런 의미에서 신부의 말은 굉장히 자기모순적이다. 교회에서 할수 있는 일은 없다는 말을 듣고 딸을 가진 아버지는 절망한다. 답을 구하러 갔지만 종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영화에서 경찰, 병원, 종교 등 인간이 구축한 코스모스는(시스템,질서) 철저히 무기력하게 그려진다. 경찰은 괴질의 원인을 독버섯이라고 결론 내렸고, 병원은 이유를 모르겠다고 답했다. 카오스와 코스모스 사이를 우왕좌왕 하면서 종구는 이제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됐다. 세상이 답을 내려 주지 않는다면 이제 자신의 믿음에 확신을 가지고 그 왜놈을 처치하러 행동에 나서야한다. 반드시 딸을 살려 내야만 한다.
종구는 이제 그놈이 귀신인지 아닌지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 그 새끼가 귀신이라면 사람 손에 죽지는 않을 테니까. 양이삼을 데리고 친구들과 함께 다시 그놈의 집에 들이닥쳤다. 아무도 없는 집을 수색하다가 온몸에 피칠갑을 한 좀비같은 괴물과 마주쳤다. 왜놈이 주술을 써서 부활시킨 인간이다.
여기서 이놈과 한바탕 사투가 벌어지고 놈은 기운을 잃고 쓰러졌지만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그 때 멀리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왜놈과 시선이 마주치고 종구와 친구들의 살벌한 추격전이 펼쳐진다.
일본인은 쫓기다가 결국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비명을 지를 듯 고통스러워 하며 마치 신세 한탄을 하는 것처럼 슬프게 운다. 이 쇼트는 명백히 일본인이 처해진 상황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객관적 쇼트로써 영화 속 그 어느 누구의 시선도 아니다. 뒤에 이어지는 장면에서 무명의 시선은 일본인의 오른쪽으로 잡히기 때문이다. (관객이 보는 화면 기준으로는 일본인의 왼쪽) 아무도 보는 시선이 없는데도 고통스러워 하거나 슬퍼 우는 모습을 일부러 보여줘서 관객들을 낚고 있다. 혹시 그가 사람 아닐까? 억울하게 당하는 건 아닐까? 영화는 그가 인간성을 가진 존재임을 보여주면서 관객의 그런 의심을 겨냥하고 있다. 앞서 추격전이 벌어질 때 도망치면서 엉덩방아를 찧는다거나 넘어져서 구르거나 하는 모습들은 그가 신적인 존재임에도 특별한 능력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 초월적인 존재라면 왜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서 관객들을 헷갈리게 만드는걸까?
이것 역시 기독교적 레퍼런스와 관련성이 있다. 신적인(초자연적) 존재가 육체를 온전히 가지고 있다 것은 결국 예수의 이야기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라는 존재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지만 예수는 완벽한 인성과 신성을 함께 갖춘 사람이자 신이라고 결론지었다. 예수는 33년 간 지상에 머무를 때 바늘에 찔리면 아파하기도,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위해 슬퍼 울기도 한 사람이었다.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마치 하나님을 원망하는 듯한 뉘앙스의 말을 하기도 했다. 나약한 인간 존재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러나 완벽한 인성을 가진 게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라는 게 기독교 신학의 결론이다. 영화 속의 ‘악마적 존재’ 일본인 캐릭터가 바로 그런 존재로 묘사된다.
무명과 일본인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되고 종구가 몰던 차는 빗길에 미끄러져 사람을 치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일본놈이었다. 추격전 끝에 절벽 아래로 떨여져 차에 치이게 된 것. 종구와 친구들은 그를 깊은 골짜기 밑으로 굴러 떨어뜨림으로써 생명을 완전히 거둔다. 끝도 없이 하강하는 이미지 속에서 인성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삶은 종언을 고한 것이다. 그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는 무명의 쇼트가 길게 이어진다. 그는 실제로 죽었고 이 영화가 차용한 기독교적 레퍼런스에 비추어 3일 만에 부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굴에서 부활한 이야기는 영화 종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자세하게 다룰 예정이다.
“버럭지 같은 놈이 미끼를 삼켜부렀구마이” 이어지는 장면에서 일광의 한 마디는 의미심장하다. 미끼를 물고 삼켜버렸다는 것은 어쩌면 예정된 수순을 그대로 밟아나간다는 뜻, 일본인이 죽고 부활해서 이후의 일들을 할 수 있게 종구 자신이 정해진 역할을 하고있구나라는 말처럼 들린다. 또는 미끼를 완전히 삼켜버렸으므로 이제는 완전히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으로 빠졌구나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미끼를 물고 있을 때는 발버둥치다가 바늘이 빠질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삼켜버린 이상 그 어떤 희망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구를 만나려고 집으로 찾아갔다가 무명을 만난 일광은 폭포수처럼 핏물을 토해내고 휘청거린다. 신통력이 이런 식으로 작용 했다는 것은 그가 무명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임을 잘 보여준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일본인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무명과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 일광은 그 일본인과 한패다.
겁에 잔뜩 질린 그는 집에서 물건을 이것저것 챙겨 도망을 가는데 날벌레 떼의 습격을 받아 차의 방향을 돌린다. 영화를 다 보고나면 알 수 있지만 이 때의 신통력은 부활한 일본인의 능력이라고 봐야한다. 왜냐하면 곡성으로 돌아가 마무리해야할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피하고 도망치는 일광을 부활한 그가 돌려 세운 것으로 보인다.
도망가려던 길과 곡성으로 돌아가는 뱡향을 응시하고 있는 일광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긴다. 가뿐 숨을 몰아쉬는 일광의 표정에서 묘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양이삼은 삼촌 오성복이 마을에 번지는 괴질에 걸려 살인을 저지르자 정체를 묻기위해 일본인을 찾아간다. 영화 종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양이삼은 무명과 교차편집 되면서까지 중요하게 등장한다. 어떻게 보면 메인 스토리에서 벗어나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적으로 힘을 주는 이유는 이 영화가 믿음에 관한 내용을 서브테마로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종구는 무명이 귀신이라는 말을 일광한테 듣고 급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일광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 종구를 낚고 관객을 낚고 있다. 효진이가 집에 안보이자 딸을 찾아 이리저리 헤메다가 무명과 마주쳤다. 덫을 쳐놨으니까 귀신이 잡힐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라는 그녀의 말에 종구는 정체를 묻는다. “사람이여 귀신이여?” 그것을 왜 묻냐는 되물음에 종구는 대답한다. “나가 그것을 알아야 니말을 믿을거 아니냐” 무명曰 “그냥 믿어”
살인사건 현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무명은 왜라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었다. 명확한 이유와 인과관계를 들어 하나의 대답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 종교의(질서) 핵심과 닿아있다. 무명이 상징하는 자연의 섭리는(코스모스) 그냥 믿으라 한다. 그러나 그 말은 종구에게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종구는 이해가 안되면 믿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종구는 일본놈이 귀신이라고 하는데 그 놈이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물었다. 그 말은 왜 하필 우리 딸이냐는 질문과 같다. “니 딸 애비가 죄를 지었응께. 남을 의심하고 죽일려커고 결국엔 죽여부렀어.” 무명은 고통과 불행의 원인에 대해 설명했다. 하나의 대답을 들었지만 종구는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 그녀의 대답은 인과관계가 뒤집혀 있기 때문이다. 무명이 죄로 언급한 내용은 다 딸이 아파서 그랬던 일들이다. 불가해한 답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거대한 폭력과 다름없다.
무명과 일광 서로가 상대방을 믿지 말라고 하는 상황에서 종구는 이제 아무도 믿을 수 없다. 그런데 조금 전 무명이 서있던 자리에서 딸의 머리핀을 발견하고는 이 모든 일들이 무명의 짓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선택의 순간 결국 집으로 달려 간 것은 일광을 신뢰해서가 아니라 본인의 판단과 확신을 믿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처음 본 관객들은 아마 이 장면에서 무명, 일광 양쪽을 두고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 지 깊은 갈등을 느꼈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도 역시 기독교적 레퍼런스를 가져와 활용한 흔적이 있다. 닭이 세 번 울 때까지만 참으라는 내용은 닭이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 이야기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죄다 니 짓이구만”이란 종구의 물음에 이를 세 번 부인하는 상대가 무명인 점이 매우 흥미롭다. 기독교 이야기를 가져와서 영화의 상황과 설정에 맞게 변주한 것이다. ‘무명 베드로’설을 주장하는 것은 영화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내용을 풍부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차용했을 뿐 그 속에 담긴 일대일 관계를 찾는 것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양이삼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 일본인과 마주한다. 여기서 그가 부활한 장소가 동굴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동굴은 예수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한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 한 후 동굴 안에 매장했다. 그를 따르던 여자들은 시신이라도 수습하려고 새벽에 동굴로 갔는데 앞을 막아뒀던 큰 돌이 없어지고 예수의 시신도 사라져 버렸던 것. 그래서 깜짝 놀라던 중에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의 부활을 알려줬다. 동굴이라는 장소를 일본인의 부활과 관련해서 등장시킨 것은 이러한 맥락이다.
양이삼은 그에게 정체를 물었고 니 생각은 뭐냐는 질문이 되돌아 왔다. “악마” 그는 양이삼에게 넌 의심을 확인하러 왔고 내가 누군지 내입으로 아무리 말해봤자 믿지 않을 거라고 했다. 즉 믿음이란 본인이 확신하는 만큼 눈에 반영되어 그대로 보인다는 뜻이다. 양이삼은 그가 악마라고 확신했고 그것은 낫을 들고 찾아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장면이 굉장히 역설적이다. 믿는대로 보이는 거라면 너는 누구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셈이 되기 때문이다. ‘악마’라는 단어는 사실 동굴 장면에서 처음 나왔고 클라이맥스에서 무명과 종구는 여전히 그를 ‘귀신’으로 지칭한다. 종구가 만약 동굴에 들어왔다면 본인이 의심하고 확신하는 귀신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다른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이 들어갔다면 각자가 생각하는 모습대로 보여졌을 것이다. 양이삼이 믿는 악마의 형상은 누런 이빨과 긴 손톱과 붉은 눈을 가진 그야말로 기독교적 악마의 모습 그대로였다.
영화에서 부활한 악마를 혼자 대면하는 인물이 왜 양이삼일까?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가 가톨릭 성직자이기 때문이다. 양이삼의 의심과 믿음의 문제를 건드리면서 그가 믿고 상상하는 악마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관객들에게 강렬한 시각적 충격을 줬다. 악마의 입에서 나온 누가복음 말씀 역시 양이삼이 그를 대면했기에 가능했던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누가복음에 있는 예수의 말을 떠올리고 더더욱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화 첫 장면과 이 장면에서 두 번 씩이나 중요하게 다뤄질 수 있었다.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부활한 그는 신적 존재를 드러냄과 동시에 가장 사악하고 무서운 기독교적 악마의 형상으로 예수가 한 말을 내뱉는다. 영화는 대담한 상상의 결과물을 보여준다.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경스러운 장면이다. 해석하기 따라서는 교회가 예수라는 가면을 벗고 추악한 얼굴을 드러냈을 때 이를 용인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까지 건드리고 있다. 영화의 핵심은 아니겠지만 믿음의 문제를 서브테마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알려진 3년 간 행적에서 수없이 많은 병을 고쳤다. 그런데 이 기독교적 악마는 정반대로 병을 내리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반기독교적 정서를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누군가는 이런 식의 표현이 매우 흥미롭게 보이겠지만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매우 불편하고 강한 거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금어초가 말라 비틀어졌다. 무명이 쳐 놓은 금줄을 넘어가는 순간 종구의 집안에 죽음이 내린다. 혈흔이 낭자한 부엌에 들어서서 아내를 발견하고 오열한다. 딸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 했지만 돌아오는 건 피할 수 없는 죽음 뿐이었다. 마지막에 무명을 신뢰했다면 화를 피할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은 무의미하다. 영화의 핵심에서도 한참 벗어나 있다. 어차피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고 종구는 본인 스스로의 판단을 믿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칼을 맞고 쓰러져있는 종구를 향해 셔터를 눌러대는 일광. 부활한 악마가 사용한 것과 같은 미놀타 카메라다. 그 일본놈과 일광은 한패였다. 미끼를 물고 삼킨 효진이와 그 가족들을 처치하기 위해 끊임없이 종구를 낚고 관객을 낚았다. 이로써 일광은 악마가 지시한 임무를 완수했다. 이 모든 재앙, 불행, 고통, 죽음에는 이유가 없다. 그야말로 카오스의 무질서, 공포 그 자체다.
카오스와 코스모스 사이에서 갈등하며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처참한 비극을 맞았다. 딸을 위해서 본인을 믿고 할 수 있는 건 다해봤지만 인간의 힘으로 불행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우연일 뿐 인간의 잘못이 아니다. 마지막에 종구를 완전히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은 감독의 배려일 수 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이런 감독의 마음을 알아채고 위로를 받을런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하기도 했고 영화 속 재앙이 마치 자연재해처럼 묘사되는 측면도 있기 때문.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일방적으로 당하는 종구는 너무 무기력해 보인다.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종구와 다른 모든 피해자 들에게 이 영화는 진심으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평론
〈곡성〉은 신비주의나 초자연적 현상을 소재로 하는 오컬트 장르 영화다. 이 장르는 악마나 묵시록 등의 기독교적 세계관과 악령을 쫓는 엑소시즘이 핵심이다. 〈곡성〉은 장르적으로 오컬트에 무속적 세계관을 접목시켜 신선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를 활용하여 화려하고 다양한 볼거리를 만들어냈다.
특히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동굴 속 장면은 마치 독립된 이야기인 것처럼 시각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가톨릭 성직자의 믿음에 관한 문제를 건드리면서 신적 존재에 대한 인식론까지 나아간다. 신은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신에 대한 믿음은 과연 무엇인가? 인간은 신적 존재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가? 이해할 수 없다해도 믿을 수 있는가? 믿음으로써 이해된다는 것은 정말 그러한가?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가? 등등 수많은 질문들을 관객들에게 던진다.
〈곡성〉의 플롯은 빈칸이 많아서 사건의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힘들다. 그런데 이 영화가 대단한 것은 영화를 다 보고나면 관객 스스로가 그 공백을 채우고 이야기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런 방식의 이야기 구성은 스토리의 양 갈래에서 관객의 선택을 묻고 갈등하게 만드는데 효과적이다. 그 과정에서 최대한의 재미를 끌어내기 위함으로 보인다. 일광이 살을 날리는 대상이 효진일까 일본인일까? 일본인은 사람인가 신인가? 무명과 일광 둘 중에 누구 말을 믿어야 할까? 영화의 힘은 생략하는 데서 나온다.
〈곡성〉은 미지의 존재와 금기에 대한 공포를 다루면서 악마의 실체를 현실세계로 소환했다. 영화가 이토록 강력한 힘과 에너지를 뿜어내는 것은 관념적이고 실존적 이야기를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결국 삶의 중요한 부분과 맞닿아 있어서 극장에서 나서자마자 내용을 곱씹게 하고 고민하게 만든다. 그런 측면에서 〈곡성〉은 굉장히 훌륭한 영화다.
〈곡성〉의 주인공 곽도원(종구) 배우의 연기는 탁월하다. 덩치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행동이 굼뜨고 움직이길 싫어하고 소극적인 사람이다. 이런 평범한 보통사람이 어떤 일을 당했을 때 '반응하는 연기'를 아주 훌륭하게 소화해낸다. 딸을 살리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활발한 움직임은 그래서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영화의 주제와도 밀접한 선택이다.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력한 인간의 실존적 비극을 보여주는 최적의 연기를 선보였다.
이 영화에서 일본인은 굉장히 이해하기 어려운 캐릭터다. 악의 존재를 우리의 이해 영역 바깥에 두고 갑자기 삶 속으로 끼어드는 설정을 보여준다. 어디서 왜 왔는지 왜 불행을 퍼트리는 지 이유도 없다. 이런 이상한 상황 가운데 ‘악’이란 인간이 겪어내야하는 실존적 삶의 조건으로 그리고 있다. 대부분의 영화나 소설이 인간 내면의 악마성에 대한 성찰과 이해 정도로 다루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그 공포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 인간은 그것을 이해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끝내 좌절하고 마는, 인간의 무력함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덧 붙이는 말
〈곡성〉을 처음 관람했을 때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기분이 나쁘면서도 이 영화가 알 수 없는 강한 힘과 에너지를 갖고 있음을 느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영화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살펴보면서 평소에 가지고 있던 궁금증이 해소되어 지금은 개운하고 홀가분한 기분이다. 〈곡성〉은 뚜렷한 영화적 성취를 이뤘을 뿐만아니라 관객들에게 생각하고 고민할 거리들을 많이 남겨줬다. 그것들이 삶의 자양분이 되어 끊임없이 성찰하게 하고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해준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훌륭하고 좋은 영화이다.
이 글을 쓰기 전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곡성〉에 대한 거의 모든 해석, 리뷰, 평론 등을 다 살펴봤다. 영화가 난해한 만큼 리뷰나 해석 역시 사람마다 다 제각각이고 그 중에는 관념적으로 빠져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글들도 상당수 있었다. 평론이 재미있는 이유는 정답이 없어서다. 그 어떤 것도 모범답안이 될 수 없기에 평론가의 글도 하나의 의견에 불과하며 그것은 내 글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 이동진 평론가의 의견을 기반으로 내 생각을 덧칠하고 추가하여 쓴 글임을 미리 밝혀둔다. 이 글은 한 마디로 지금까지 웹 상에 있는 모든 글을 읽고 내 나름대로 정리한 〈곡성〉의 이해와 감상 종합판이다. 재미와 이해를 더하려고 영상, 사진, 글 텍스트를 함께 실었다. 지금까지 나온 그 어떤 글과 비교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지인 작가, 평론가
destiny2135@gmail.com
= 참고 =
[무비딥] 이동진의 끝장 평론 ‘곡성’ 대해부